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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 버전 / 도로시 길먼(Dorothy Gilman) / 송섬별 옮김 / 북로드

처음 두세 쪽을 읽다가, 아, 이 책은 나이를 지긋이 먹은 중년 이상의 여성들 대상의 책인가 보다 하고, 성급히 책을 덮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몇 페이지만 더 읽을 수 있다면, 이 책이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노년층을 위한 책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인생이 쓸모없다고 느껴지는 사람, 아니,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에게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는 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하나도 없는 걸까?
내가 뜻밖의 존재가 될 수 있는 분야는 없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 불가능한 일이야.

 

이렇게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에 나오는 폴리팩스 부인(Mrs. Pollifax)의 말을 참고하길 바란다.

 

그래도 일단 한번 해보는 건 어떨까?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건 없지.
게다가 난 세금도 꼬박꼬박 내고 있는걸.

 

수십 년간 성실하게 세금을 냈을 게 뻔한 폴리팩스 부인의 말마따나, 성실납세자가 그동안 낸 세금 덕 좀 보겠다는데 당최 문제 될 게 무어란 말인가.

 

폴리팩스 부인의 성격은 다음과 같은 묘사에서 알 수 있다.

 

가만히 앉아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은 부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부인은 쉽게 굴복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해온 사소한 반항의 목록은 끝이 없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한 번 더 해봐도 되지 않겠는가?

 

게다가, 죽음을 앞둔 폴리팩스 부인이 하는 말이 걸작이다.

 

내가 뭘 했다고........

 

물론, 이 물음에 대한 폴리팩스 부인의 대답 또한 걸작이다.

 

그러자 부인의 입가에 희미한 쓴웃음이 떠올랐다.
내가 뭘 했느냐면, 일단 CIA 본부에 들어가서 스파이 일을 달라고 했지.

 

이처럼 폴리팩스 부인은 자신이 평범한 노부인이 아니라 진짜 스파이이기 때문에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위안을 삼는다. 정말 대단한 부인이 아닌가.

심각할 수 있는 소재이지만 지나치게 무겁지는 않고, 노부인이 주인공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속도감 있게 전개되며, 무엇보다도, 이 폴리팩스 부인의 캐릭터가 정말 매력적이다.

소위 오늘날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주인공, 즉 민폐 캐릭터가 결단코 아니다.

즉흥적이지만 계획적이고, 성급한 듯 보이나 결단력이 있고, 인생을 살아 온 만큼의 연륜과 더불어 맞부닥친 상황에 대해 도전할 수 있는 패기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제 어느 때든 결코 포기하지 않는 굳건한 의지를 가진, 쾌활하고 상냥하며 재치 있는 노부인이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 여성이란 말인가.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을 기분 좋게 읽을 수 있는 이유는 이 책의 악당들의 대부분이 뜻밖에 상냥하고 친절한 인물들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무려 친절하고 상냥한 악당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이 번역본이기 때문일 것이다. 원서로 읽을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번역본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상냥함이 바로 그것이다.

상상해 보라. 납치해 온 노부인에게 협박을 하는 악당이 나오긴 하는데, 그 입에서 나오는 말투라는 게 아주 친절하고 상냥한 존대말이라면 어떨까.

이 책에 나오는 악당들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악당들로 영화 <시스터 액트>에 나오는 악당들 정도를 들 수 있겠다.

살인 사건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가수 들로리스를 죽여야 하는데, 하필 이 여자가 수녀복을 입고 있네? 수녀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총을 쏘려 하다가도, 어, 진짜 수녀이면 어떡하지? 우리는 죄를 짓는 건데? 하는 고민으로 결국 그녀가 도망칠 때까지 총을 쏘지 못하던 악당들을 기억하는가? 바로 그런 느낌의 악당들을 생각하면 된다.

물론, 정말 못된 악당(폴리팩스 부인의 뺨을 내려친 쓰레기)도 나온다. 하지만 아주 잠깐 나온다.

이 악당 덕분에 폴리팩스 부인은 구른다. 그런데 그 못된 악당은 폴리팩스 부인에게 별 못된 짓을 하지 못한 채 나자빠지고, 폴리팩스 부인은 나름 별일없이 악당이 만들어 낸 곤경에서 빠져 나온다.

이런 소설을 읽고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저자 도로시 길먼은 폴리팩스 부인의 고향인 뉴저지 주 뉴브런즈윅에서 태어났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책을 쓰면서 작가의 삶을 시작하고 가족을 꾸렸지만, 그녀의 삶에도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남편과 이혼하고 두 아이를 대학에 보낸 뒤 혼자 캐나다 노바스코사의 작은 마을로 이주한 것이다.

1965년 코지 스파이 스릴러의 고전이 된 <뜻밖의 스파이 폴리팩스 부인>을 발표하기 직전인 1965년,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내려놓고, 에측 가능한 세계의 국경을 넘어서 자기 안의 새로운 나라를 탐구하기로 결심한 순간 이 책을 썼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 온 입장에서 본다면, 폴리팩스 부인이 전해 주는 메시지가 그리 가볍지만은 않은, 하지만 따뜻하고 상냥하고 친절한 미스터리 스릴러 물.

이게 바로 코지 미스터리의 대모라고 불리는 도로시 길먼의 <뜻밖의 스파이 폴리팩스 부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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